통영시립박물관 역사와 전통을 지키며, 통영시민과 통영을 대표하는 통영시립박물관 각종 유물자료와 시민들을 위한 문화박물관으로 거듭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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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사문화
  • 기원전5,000년경~기원전 4세기경
    Prehistoric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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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통영 지역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연대도ㆍ욕지도ㆍ상노대도 같은 섬에는 신석기시대 조개무지가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 쓰레기라 할 수 있는 조개무지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ㆍ도토리 등의 음식물, 토기ㆍ골각기ㆍ석기 같은 버려진 도구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신석기 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질 만큼, 신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이후 청동기시대에는 남평리 지석묘 유적에서 토기류와 함께 석검, 석촉, 다량의 옥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의 통영에도 우월한 지위를 가진 지배층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대도 조개무지(煙臺島 貝塚)

연대도조개무지(貝塚)는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연대도에 위치하며, 신석기시대조개무지로 사적 제3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대도조개무지는 1980년대 초 처음 학계에 알려졌으며, 1987년 태풍 셀마호에 의해 바다에 접한 밭일부가 유실되면서 유적의 단애부(斷崖部)가 크게 노출됨에 따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학술발굴을 실시하였다. 발굴조사결과 신석기시대 무덤군이 조사되어 당시의 매장형태와 형질인류학적 자료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들 인골자료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인골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무덤은 총 15기가 발굴되었고 그중 13기에서 인골이 출토되었다. 무덤에서는 다량의 흑요석과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며, 특히 흑요석은 큐슈북부 사가현의 코시타케에서 가져온 것으로 판명되어 5000년 전부터 바다를 이용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노대도 조개무지(貝塚)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노대리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조개무지 유적으로 1978년 연세대학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상리유적과 1988년 부산수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산등유적이 있다. 상노대도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전기와 후기문화가 확인되며, 신석기시대 전기는 방사선탄소연대 측정결과 6,430 B.P로 확인되었으며, 소량의 덧무늬토기와 눌러 찍은 무늬토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겹입술토기가 출토되고, 공이, 공이판, 갈돌, 갈판과, 특히 흑요석화살과 죠몽토기 등 일본과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욕지도 조개무지(貝塚)

통영시 욕지면 동항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조개무지 유적으로 한국전기공사 건물을 짓던 중에 알려져 1988~1989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2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욕지도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최초로 인골과 함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인골은 분석결과 어른 남자와 20세 전후의 여자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는 화살촉, 작살, 긁개, 그물추 등의 간석기와 마름모로 집선문을 만든 태선문 계열 토기편과 손톱무늬를 비롯한 찍은 무늬를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남평리 청동기 유적(藍坪里 靑銅器 遺蹟)

통영 남평리 유적은 통영 산양 스포츠파크 조성 중 확인되어 동서문물연구원에서 2007년 6월 18일부터 2007년 11월 9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무덤(埋葬遺構) 15기, 구덩이(竪穴遺構) 2기, 도랑(溝狀遺構) 2기, 고상가옥(高床家屋) 1기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무덤은 모두 평평한 돌(割石)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며, 묘역시설이 설치된 고인돌(支石墓)는 평평한 돌(割石)을 이용하여 평면형태를 직사각형(長方形)으로 구획한 후 구획석 내에 평평한 돌을 채워 넣었다. 구획시설 내에는 덮개돌(床石)이 놓여져 있다. 출토유물은 돌칼(石劍), 돌화살촉(石矢),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옥 등이 출토되었으며, 15기의 무덤 중 9기에서 옥이 출토되어 옥의 출토빈도가 특히 높다.

대표 유물안내

대표유물

  • 삼국시대
  • 기원전후~757년
    Three Kingdom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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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삼국시대 통영은 『삼국지』위서 동이전 변ㆍ진조에 의하면, 변진 12국 중 변진고자미동국이나『삼국사기』열전 물계자전(勿稽子傳)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포상8국 중의 고사포(古史浦) 혹은 고자국에 비정되는 현재의 고성지역에 속한 지역으로, 삼국시대 소가야권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사기』에 의하면 가야지역에는 13개의 정치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김해의 남가야(南加羅), 고령의 가라(加羅), 함안의 안라(安羅), 합천의 다라(多羅) 등이 있었고, 고성지역은 고차국(古嵯國)으로 비정된다. 고차국의 영역에 포함된 지역으로는 고성, 통영, 사천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560년경 안라국이, 562년 가라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는 쇠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통영지역도 신라영역에 편입되게 된다.

남평리 고분군(藍坪里 古墳群)

남평리 고분군은 통영시 산양읍 남평리 742번지 일원으로 산양스포츠파크 조성사업 중 발견되어, 2006년 6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4개월간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남평리 고분군은 통영지역에서 처음 발굴된 소가야 고분군으로 나무덧널무덤(木槨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이 조사되었으며, 내부에서는 덩이쇠(鐵鋌), 옥목걸이(頸飾)를 비롯한 위세품(威勢品)과 굽다리접시(高杯), 손잡이 달린 잔(把杯) 등 소가야 토기가 출토되었다.

안정리 고분군(安井里 古墳群)

안정리 고분군은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1074-2번지 일원으로 공동주택사업 조성 공사 중 확인되어 2007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돌방무덤(石室墓) 6기와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가 확인되었으며, 고분군 축조 시기는 7세기대로 추정된다. 고분 내부에서는 목긴항아리(附加口緣長頸壺)와 짧은굽다리접시(短角高杯) 등 신라양식 토기가 출토되어 통영지역이 신라영역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대표 유물안내

대표유물

  • 고려시대
  • 995년~1391년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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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고려시대 역은 중앙과 지방을 효율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설치한 교통통신조직의 일종으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역은 30리(12km)마다 1개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525개 역이 분포하였다. 이 역들은 22개의 역도로 구분되어 있는데, 역도의 관할면적 및 교통량에 비례하여 역의 수에 차등을 두었으며,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었다. 통영 안정리와 황리는 대동여지도에 춘원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고성과 거제를 잇는 역로로 춘원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춘원역은 조선 초 구노(丘爐)(현재 통영시 도산면 법송리)로 역이 옮겨지기 전까지 번성하였다.

안정리 유적(安井里 遺蹟)

안정리 유적은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와 황리에 소재하며, 통영안정국가공단조성사업 중 발견되었다. 1998년 6월부터 1999년 1월까지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 역으로 알려진 춘원역지와 춘원역지와 인접한 구릉에서 제사유적이 확인되었다.

나라와 길손의 안녕을 빌다

높은 산은 일찍이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산 정상은 하늘을 향해 인간의 염원을 담아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산을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는 형태를 산정제사라고 하며, 높은 산중에서도 기가 충만하여 하늘과 영이 통한다고 하는 장소는 옛날부터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곳은 고려, 조선시대까지 누대에 걸쳐 그 맥이 이어지며, 현대에 이르러 무속신앙과 결합된 경우가 많다. 안정리 제사유적은 '춘원역지'와 연접하여 있는 큰달골산(해발89.5m)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북ㆍ남ㆍ동쪽을 조망하기 좋은 길지이다. 또한 거제와 고성을 이어주는 중간지점으로 최근까지 무속의례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유적 내에서는 많은 도자기편과 철마(鐵馬)가 출토되어 예부터 나라와 길손의 안녕을 빌던 제사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대표 유물안내

대표유물

  • 조선시대
  • 1593년~1896년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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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통제영은 선조 26년(1593) 이순신 장군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한산도에 처음 설치한 후 거제현으로 옮겨졌다가 선조 37년(1604)에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의해 현재 지역(통영시 문화동 62-1)으로 옮겨왔다. 이후 통제영은 고종32년에 폐영될 때 까지 약 300년간 조선 수군의 최고 통치관청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12공방은 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긴 이후 통제사가 전국의 공인들을 불러들여 공방을 일으킨 것이 그 시초이다. 정조 연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영지]와 1934년 발간된[통영군지]에 12공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8~19세기에는 이 12공방에서 만든 제품들이 국내 전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통제영지와 12공방지는 통제영복원사업을 위해 2005년 12월 부터 2007년 4월까지 순차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사하였으며, 조사결과 19동의 건물지와 축대 등이 확인되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이순신과 거북선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왜의 침략을 예상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에 대해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조선기술(造船技術)에 뛰어난 막하의 군관 나대용으로 하여금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제작을 지시하였다. 거북선의 구조와 제도에 대한 기술적 자료는 보전ㆍ전승되지 않았으나, 이순신이 임진년 6월 14일에 써 올린「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과 정랑 이분(李芬)의 <행록(行錄)>속에 잘 설명 되어 있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 용두를 설치하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唐浦破倭兵狀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하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이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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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유물

  • 통영공방
  • 1900년 ~ 1995년
    Modern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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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통제영 공방은 임진왜란 당시 통제사 이순신의 한산도 진영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뒤 선조 37년(1604) 통제영이 두룡포로 옮겨 설치한 이래, 안정적으로 발전해온 통제영 공방은 18세기 후반부터 각 제품의 주요 생산 공방이 대규모로 밀집하여 상호 분업 및 협업체계를 이루는 12공방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12공방은 고종 32년(1895)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맥은 오늘날 통영의 전승 공예로 계승되고 있다

통영반統營盤

통영소반은 통제영 12공방 가운데 소목방小木房에서 그 기능이 전승되었다. 황해도의 해주소반, 전라도의 나주소반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소반의 하나일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특히 통영소반은 나무결의 문양이 아름다우며, 단순한 구조와 그 견고함이 으뜸이었다.

통영 자개

통영 자개는 통제영 12공방의 패부방貝付房과 칠방漆房에서 그 기능이 전승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나전칠기에 무늬를 놓는 기법은 자개(소라ㆍ전복껍질)를 실톱으로 썰거나 줄로 다듬어 주로 사물의 형태를 오려서 표현하는 ‘주름질’ 과 실 날같이 가늘게 오려서 기하학적인 연속무늬를 만드는 ‘끊음질’이 있다.

통영 갓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이래 군영에 공방工房을 두었는데, 그 중에 입자방笠子房으로부터 갓을 제작하는 기능이 전승되었다. 말총ㆍ대ㆍ명주실ㆍ아교ㆍ먹ㆍ생칠ㆍ숯 등을 원자재로 제작되는 갓은 모자와 양태로 구분되었다. 특히 통영에서 제작된 섬세하고 미려한 ‘통영갓’을 그 최상품으로 쳤다.

송주안(1901~1981)

송주안사진

통영에서 태어나 17세에 통영칠기의 거장 박정수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고, 통영군립공업전습소에서 근대 나전칠기의 개척자라 불리는 스승 전성규를 만났다. 1921년 전성규와 함께 일본 도야마현의 조선나전사에서 8년동안 나전 일을 가르치다가 귀국한 뒤, 일본인 하시다(橋田)가 운영하는 통영칠기제작소에서 10년간 근속하였다. 1940년 태천군립칠공예소장직을 역임하였고, 1941년 통영칠기제작소 제2공장장으로 일하였다. 해방 후 대구칠기공장, 통영칠기주식회사 등에서 일하였고, 1965년 아들 송방웅과 함께 태평공예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79년 송곳상사를 이용한 끊임질의 대가라는 평가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임장으로 인정되었고, 1981년 81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김봉룡(1902~1994)

송주안사진

통영에서 태어나 17세에 통영칠기의 거장 박정수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고 이후 통영군립공업전습소에서 근대 나전칠기의 개척자로 알려진 스승 전성규를 만났다. 1920년 스승 전성규를 따라 일본 도야마현 조선나전사에서 1년 6개월간 체류하였으며, 이때 공업용으로 사용하는 실톱의 사용법을 익혀 이것으로 자개를 오리는데 활용함으로써 주름질 기법의 혁신을 가져왔다. 1924년 일본 교토시(京都市) 주최 세계박람회에 『문고文庫』를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대화병大花甁』을 출품하여 은상을 수상하는 등 조선 나전칠기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66년 우리나라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칠기장으로 인정받았고, 1994년 91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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